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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근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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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사 근왕당은 1861년 도사 번에서 결성된 존왕양이 운동 단체이다. 야마우치 요도의 가택 연금과 막부의 미온적인 대처에 대한 반발로 존왕양이 사상이 확산되면서 다케치 한페이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도사 근왕당은 외국인 배척과 번주의 상경을 목표로 활동하며 요시다 도요 암살을 주도했으나, 8.18 정변과 도사 근왕당의 옥으로 탄압받아 쇠퇴했다. 이후 일부는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하고, 일부는 유신 후 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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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근왕당
개요
창립분세이 11년 (1828년)
해산게이오 4년 (1868년) 4월
유형정치 단체
활동 지역도사 번 (현재의 고치현)
목적존왕양이
관련 인물다케치 한페이타
오카다 이조
다나카 신베이
히지카타 나미에
지바 주타로
가와다 쇼지로
요시무라 도라타로
나카오카 신타로
사카모토 료마
역사적 배경
시대적 배경막말
존왕양이 사상존왕양이 운동의 영향
주요 인물
지도자다케치 한페이타 (후에 다케치 즈이잔)
주요 구성원오카다 이조
다나카 신베이
히지카타 나미에
지바 주타로
가와다 쇼지로
요시무라 도라타로
나카오카 신타로
사카모토 료마
활동 내용
주요 활동존왕양이 운동
번정 개혁 요구
공무합체 운동 반대
주요 사건분큐 3년의 정변
다케치 즈이잔의 자결
영향
영향메이지 유신에 영향
관련 단체가이에이타이

2. 결성 배경

19세기 중반, 일본은 서양 열강의 개항 압력으로 국내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도사 번에서는 다케치 한페이타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세력이 형성되었다. 1858년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과 불평등 조약 체결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도사 번의 하급 무사들은 막부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존왕양이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2. 1. 존왕양이 운동의 확산

1859년 2월, 도사 번의 다이묘 야마우치 요도는 쇼군 계승자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하려는 노력 때문에 타이로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 가택 연금되었다. 이는 많은 도사 사무라이들을 격분시켰고, 그들은 이후 1860년 3월 사쿠라다몬 사건에서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환호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1858년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에 충격을 받고, 도쿠가와 막부가 이 위협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고 인식하면서, 존왕양이 운동이 도사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1860년 5월, 다케치 한페이타는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규슈와 일본 서부를 순회하며 국학 학자 히라타 아쓰타네의 저작들을 가져왔고, 이는 그의 존왕양이 운동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1]

3. 도사 근왕당의 결성과 활동

1861년 다케치 한페이타는 에도에서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사쓰마 번의 가바야마 스케노리 등과 교류하며 존왕양이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2] 같은 해 8월, 다케치는 도사 번에서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192명의 동지를 모아 도사 근왕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2]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에서 최초로 가맹했지만, 후시미 의거 권유를 받아 탈번하여 다케치 즈이잔 등과 함께 행동한 것은 짧은 기간이었다.[1]

오이시 야타로가 초안을 작성하고 다케치 즈이잔이 정서한 맹약서에는 존왕양이 사상과 함께,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한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의지를 잇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2] 맹약서는 2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으며, 혈맹 외 동지, 협력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이 넘었다고도 한다. 이는 도사에서 존왕양이 운동의 큰 세력이 되었다.[1]

도사 근왕당은 "거번근왕(擧藩勤王)", 즉 번 전체가 근왕을 행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케치는 사쓰마, 조슈, 도사의 동지 간 회합에서 세 번주가 동시에 입경할 것을 제안하고, 도사 번 참정 요시다 도요에게 여러 번 회견을 신청하여 설득하려 했으나, 요시다 도요는 이를 '서생론'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

1862년 5월 6일, 다케치 한페이타의 지시를 받은 나스 신고 등 도사 근왕당원들은 요시다 도요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요도파는 실각하고 보수파 중심의 정권이 탄생했으며, 번청(藩庁)은 더 이상 근왕당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번 안팎으로 높아지는 존왕양이 운동의 압박에 밀려 근왕당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었다.

다케치 한페이타는 도사 번이 조슈 번과 유사한 특권을 얻도록 하기 위해 교토에 파견되어 허가되었다. 교토의 도사 군대는 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야마우치 요도가 그곳에 거주지를 마련했다.[1] 오카다 이조, 다나카 신베에 등 "4인의 암살자"를 포함한 도사 근왕당원들은 암살단으로서 교토와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암살된 요시다 도요의 지지자들과 신센구미 및 교토의 다른 쇼군 군사 세력 구성원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살해했다.[1] 다케치는 야마우치 도모노리의 이름으로 천황에게 왕정 복고를 옹호하는 청원을 작성하여 기나이 지방의 5개 지방을 황제의 직할 통치 하에 두고, 황제에게 책임을 지는 국가 군대를 창설하며, 앞으로의 칙령은 쇼군이 아닌 천황의 옥좌에서 발포되어야 하고, 외국인들을 즉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천황의 공식 사절로 에도로 파견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알현했으나, 모호하고 확답 없는 답변을 받았다.[1] 그는 전례 없는 영예를 안고 교토로 돌아왔지만, 곧 도사 근왕당을 진압하고 그들의 조정 및 다른 번과의 정치적 협상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야마우치 요도의 불쾌감을 더욱 키웠다. 다케치는 해임되어 도사로 소환되었지만, 그는 삿초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1]

『도사근왕당 동지 성명부』에 따르면, 상사 신분임에도 근왕당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있었다.[1]

이름비고
후카오 카나에 시게사키
시바타 비고 가쓰모리
야마우치 시모후사(사카이 쇼사쿠)
고토 구라노스케 마사미무진동정에 종군, 후에 도사번 대상사
후카오 단바 나리야스무진동정에 종군, 도사번 진충대 초대 총독, 다케치 즈이잔의 상사 승격에 적극적으로 참여
후카오 호고로
고미나미 고로에몬 요시카즈
히라이 젠노조 마사자네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친족
야마카와 사에몬
가시와바라 구라노마
아메모리 겐고에몬
오카무라 사쿠사쿠
이누이 다이스케 마사카타(이타가키 다이스케)
하야시 고이
이타사카 산고에몬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친족
타니 모리베 타테키
다케치 한페이타 코다테(즈이잔)
시마무라 히사노스케
모토야마 타다이치로 시게토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친족
히구치 신키치


3. 1. 결성

1861년, 다케치 한페이타는 에도에서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 사쓰마 번의 가바야마 스케노리 등과 교류하며 존왕양이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2] 같은 해 8월, 다케치는 도사 번에서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192명의 동지를 모아 도사 근왕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2]

도사 근왕당의 맹약서에는 존왕양이 사상과 함께,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한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의지를 잇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맹약서는 오이시 야타로가 초안을 작성하고 무치 즈이잔이 정서했다.[1]

도사 근왕당은 맹주인 무치 즈이잔을 포함하여 조시와 게시의 중간 신분 출신이 많았고, 고시층을 중심으로 하는 게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1] 쇼야 출신도 많았으나, 당시 번정을 쥐고 있던 상급 무사(조시)의 참가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그 친족 등을 포함해 20명 정도였다.[1]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에서 최초로 가맹한 사람이었지만, 후시미 의거 권유를 받아 탈번하여 무치 즈이잔 등과 함께 행동한 것은 짧은 기간이었다.[1]

맹약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2. 맹약과 사상

오이시 야타로가 초안을 작성한 맹약서에는 존왕양이 사상과 함께,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권력을 잃은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뜻을 잇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2] 이 맹약서는 무치 즈이잔이 토사로 가져왔으며, 최종적으로 20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다. 혈맹 외 동지, 협력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이 넘었다고도 하며, 토사에서 존왕양이 운동의 큰 세력이 되었다.[1]

도사 근왕당은 "거번근왕(擧藩勤王)", 즉 번 전체가 근왕을 행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무치가 사쓰마, 조슈, 토사의 동지 간 회합에서 세 번주가 동시에 입경할 것을 제안하고, 토사 번 참정 요시다 도요에게 여러 번 회견을 신청하여 설득하려 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요시다 토요는 이를 '서생론'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

다음은 원문 소스에 있는 맹약의 내용이다.

'''

"당당한 신주(神州)가 이적(夷狄)에게 욕됨을 당하고,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야마토 정신도 이제는 끊어지려 하고, 천황은 깊이 슬퍼하시나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진 어가(御家)의 인순위타(因循委陀)라는 속성에 익숙해져, 홀로 이 마음을 떨쳐 일으켜 황국의 화를 물리치는 자가 없도다. 공교롭게도 우리 공(公)이 굳게 이 일을 근심하시어, 유사의 사람들에게 말하며 다투셨으나, 도리어 그 때문에 죄를 얻으셨나이다. 이처럼 고마운 어심(御心)이 계시거늘, 어찌하여 이 죄에 빠지셨는가. 임금이 욕됨을 받으면 신하는 죽는다. 하물며 황국이 지금이라도 옷깃을 왼쪽으로 하려는 것을 다른 데서 볼 수 있겠는가. 저 야마토 정신을 분발시키고, 성(姓)이 다른 형제의 결속을 맺어, 조금의 사사로운 뜻도 끼어들지 않고, 서로 모의하여 국가 흥복의 만일에 도움이 되게 하려 한다.

금기(今旣) 만약 한 번 든다면, 단결하여 물과 불도 밟겠다라고, 이에 신명(神明)에게 맹세하며, 위로는 천황의 어마음을 편안하게 받들고, 우리 공의 뜻을 이어받아, 아래로는 만민의 환란도 떨쳐 버리려 한다. 그러므로 이 중에 나라도 다른 자가 무엇 때문에 다투려 한다면, 신의 노여움과 죄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배를 갈라 죽이리라, 각자 자신의 이름을 써서 기록하여 보존한다."

'''

3. 3. 요시다 도요 암살

요시다 도요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한 전 영주 야마우치 요도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번정 개혁 노선에 대한 불만으로 보수파 상사(上士)들의 지지를 잃었다. 도사 근왕당은 본래 보수파와 대립하는 입장이었지만, 요시다 도요 제거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보수파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862년 5월 6일, 다케치 한페이타의 지시를 받은 나스 신고 등 도사 근왕당원들은 요시다 도요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도요파는 실각하고, 보수파 중심의 정권이 탄생했다. 번청(藩庁)은 더 이상 근왕당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번 안팎으로 높아지는 존왕양이 운동의 압박에 밀려 근왕당의 의견을 수용하게 되었다.

3. 4. 국사 주선 활동

다케치 한페이타는 도사 번이 조슈 번과 유사한 특권을 얻도록 하기 위해 교토에 파견되었고, 이는 허가되었다. 교토의 도사 군대는 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야마우치 요도가 그곳에 거주지를 마련했다.[1] 오카다 이조, 다나카 신베에 등 "4인의 암살자"를 포함한 도사 근왕당원들은 암살단으로서 교토와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암살된 요시다 도요의 지지자들과 신센구미 및 교토의 다른 쇼군 군사 세력 구성원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살해했다.[1] 다케치는 야마우치 도모노리의 이름으로 천황에게 왕정 복고를 옹호하는 청원을 작성하여 기나이 지방의 5개 지방을 황제의 직할 통치 하에 두고, 황제에게 책임을 지는 국가 군대를 창설하며, 앞으로의 칙령은 쇼군이 아닌 천황의 옥좌에서 발포되어야 하고, 외국인들을 즉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천황의 공식 사절로 에도로 파견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알현했으나, 모호하고 확답 없는 답변을 받았다.[1] 그는 전례 없는 영예를 안고 교토로 돌아왔지만, 곧 도사 근왕당을 진압하고 그들의 조정 및 다른 번과의 정치적 협상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야마우치 요도의 불쾌감을 더욱 키웠다.[1] 다케치는 해임되어 도사로 소환되었지만, 그는 삿초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1]

근왕당은 요시다 도요 제거라는 공통된 목적을 위해 보수파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1] 1862년 5월 6일(분큐 2년 4월 8일), 다케치의 지시를 받은 나스 신고 등 근왕당 당원들에 의해 도요는 암살당했다.[1] 이 사건 이후, 도요파는 실각했고, 보수파 중심의 정권이 탄생했다.[1] 번청(藩庁)은 더 이상 근왕당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번 안팎으로 높아지는 존양 운동의 고조에 밀려, 근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1]

『토사근왕당 동지 성명부』에 따르면, 상사 신분임에도 근왕당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있었다.[1]

이름비고
후카오 카나에 시게사키
시바타 비고 가쓰모리
야마우치 시모후사(사카이 쇼사쿠)
고토 구라노스케 마사미무진동정에 종군, 후에 토사번 대상사
후카오 단바 나리야스무진동정에 종군, 토사번 진충대 초대 총독, 다케치 즈이잔의 상사 승격에 적극적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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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치 한페이타 코다테(즈이잔)
시마무라 히사노스케
모토야마 타다이치로 시게토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친족
히구치 신키치


4. 탄압과 쇠퇴

근왕당은 산조 사네토미를 통해 도사번 주군의 상경과 국사 주선을 실현하고자 했다. 분큐 2년 8월,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가 상경할 때 다케치 한페이타 등이 수행했다. 다케치와 히라이 슈지로 등은 타번 응접역을 맡아 각 번과의 교섭 및 조정을 담당했고, 오카다 이조, 다나카 신베 등을 통해 안세이 대옥 당시 존왕양이파 탄압에 관여한 인물들을 숙청하는 등 교토에서 급진적인 존왕양이 운동을 주도했다. 같은 해 10월, 조정이 막부에 쇄국 실행을 요구하는 칙사를 에도로 보낼 때 다케치 등 상당수의 근왕당원이 위사로 동행했다.

4. 1. 도사 근왕당의 옥

야마노우치 요도가 근신에서 풀려 귀국하면서,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으로 도사 근왕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케치 한페이타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1865년, 다케치 한페이타는 "군주에 대한 불경 행위"라는 죄목으로 할복을 명받았고, 오카다 이조 등은 참수되었다. 이 사건을 '도사 근왕당의 옥'이라 부른다.

5. 해체 이후

다케치 즈이잔의 죽음으로 도사 근왕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나카오카 신타로를 포함한 일부 생존자들은 번을 떠나 낭인이 되어 반(反) 쇼군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나카오카의 중재를 통해 도사번은 반 쇼군 동맹에 참여했고, 도사 근왕당 탄압을 주도했던 고토 쇼지로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천황 통치 복원을 위한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다. 다케치는 1877년 사후 사면되었고, 1891년 황실로부터 정4위 훈위를 추서받았다.

5. 1. 두 갈래의 길

다케치 즈이잔의 사망으로 도사 근왕당은 붕괴되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번을 떠나 낭인이 되었고, 나카오카 신타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번에 남은 세이오카 미치노스케 등 23명은 기타가와촌 노네산에 모여 결기했으나 번청에 진압되어 전원 참수되었다. 탈번한 이들 중에는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번 외에서 해원대육원대를 설립하는 등 막부 타도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참조

[1] 서적 『土佐勤王党同志姓名附』
[2] 서적 土佐勤王党 考察 私家版 1997-09
[3] 서적 真説 岡田以蔵 幕末暗殺史に名を刻んだ「人斬り」の実像 学研プラス 2010
[4] 문서 深尾丹波の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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